[집회 참여]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

한사성
2024-12-10
조회수 601


한사성은 11월 16일 이태원 광장에서 진행된 트랜스젠더 추모의날 집회에 함께 했습니다.

비 내리는 이태원에서 먼저 간 이들을 기리며 노래하고 춤추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이효린 활동가가 지난 9월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 이연수 활동가를 기리며 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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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서 활동하는 이효린이라고 합니다.
한사성은 온라인 공간의 젠더폭력과 성산업 플랫폼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여성단체입니다.

지난 9월, 함께 동고동락하던 트랜스젠더 동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그저께 퇴근하며 잘 가라고 인사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작년 7월 한사성의 후원회원이 되었고 12월부터 상근활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상근활동가 지원서를 냈을 때 이이와 함께 활동하는 것을 기대하며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와 함께 활동하며 우리의 페미니즘이 더 벼려지기를, 정치가 선명해지기를, 진지함과 뜨거움이 환류되기를, 공명하고 확장되기를 기대하며 동지로 맞이했습니다.


2024년을 여는 날에 그녀는 무려 81가지의 만다라트 신년계획을 발표했는데, 올 해의 목표는 ‘성장과 기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체 활동 안에서도 성장하고 기여하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리던 어느 날, 전국 여성폭력 활동가 워크숍으로 다 같이 전북에 가게 되었는데, 그녀가 운전을 자처했습니다. 그녀 빼고는 아무도 운전을 할 줄 몰라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근데 그녀가 그렇게까지 초보운전인 줄은 몰랐어요. 고속도로의 모든 차가 우리를 앞질러 갔습니다. 3시간 정도의 거리를 6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어요. 그녀가 회장에 들어와서 제게 귓속말로 “나 이렇게 여자 많은데 처음 와봐”라고 할 때 저는 그 설렘을 충분히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2시간을 지각해서 심기가 불편했거든요.

기부금영수증 발행이 그녀의 첫 업무였습니다. 한사성은 처음으로 기부금영수증 발행 단체가 되어 실무 프로세스가 마련되어있지 않았고, 그녀는 맨땅에 헤딩하듯 수많은 문의 건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신입 활동가에겐 버거웠을 거예요. 그러다 후원금 관리 프로그램에 자꾸 오류가 나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수정하고 고쳐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갑자기 모니터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채로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을 주문 외우듯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엄청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툴고 미숙하더라도 열심을 다 하던 것, 잘 못 하는 일이라도 선뜻 나서서 맡는 것, 그녀가 이 활동에 기여하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성장하고자 얼마나 진심을 다 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활력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온갖 대외활동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떠난 뒤 계속 질문했습니다. 왜? 왜일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우리가 무엇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변화에 절박할수록 더 열심이고, 열심일수록 더 절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그 절박함에 심호흡할 수 있는 순간을, 조금은 천천히 갈 수 있는 여유를 같이 만들었다면 좋았겠단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그녀는 너무하게도 제 생일에 떠났고, 오늘은 그녀가 간 지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생일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들은 것이 부고 소식이었던 탓에 태어나 가장 혼비백산한 생일을 보냈고요, 그날은 아무도 저한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떠난 그녀의 생일에 동료들과 같이 해외직구까지해서 오타쿠인 그녀의 최애 캐릭터 한정판 키보드를 선물로 주었는데요, ‘어쩜 너는 내게 이럴거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그냥 그녀가 버텨낼 수 있었던 날이 오늘까지였나 보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매년 생일에 저는 조금 울적해지고 그녀가 보고싶기도 하고 어쩌면 원망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피해지원 현장에서 피해지원 활동가의 역할은 ‘피해를 겪은 자 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움과 고통에 고꾸라질 때도, 씩씩하게 꿈같은 미래를 상상할 때도 같이 맞장구를 치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곁에 있는 것이지요. 소외되고 배제되는 자, ‘정상’의 규범에서 탈락되는 자, ‘이상한’ 존재들과 함께 따뜻한 양지를 걷고자 하는 것이 페미니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실천하는 이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저는 그녀의 죽음의 이유들을 계속 포착하고 고민하면서 그녀가 남긴 과제를 풀기 위해 그녀처럼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특성 때문에 종결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피해경험자는 언제까지 유포될지 모르는 절망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지독하게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는 건 부질없단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자의 ‘괜찮음’을 상상해야 합니다. 먼지같은 차별을 온몸의 통각으로 느끼는 사람과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성별이분법에 따라 자신의 성별을 ‘증명’해야만 하는 구조와 ‘정상’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치적 힘을 얻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맞서야 합니다.

참담하다가 그립고, 울다가 그냥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동지들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밤늦도록 그녀 몫까지 사업 마감을 치며 ‘이놈의 기지배 어디갔냐’며 하늘에 대고 불평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 그녀의 삶과 죽음에 기여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녀처럼 진지하고 뜨겁게, 또 유쾌하고 재밌게, 여러분 같이 살아갑시다. 힘들 땐 좀 쉬다가 지치면 등도 밀어주고, 농담도 하면서요, 그래도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 모두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위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싸워나갑시다. 그렇게 그녀가 만들고 싶어했던 세상이 비로소 올 때까지 계속 같이 살아갑시다.

그녀가 떠나기 전 상근활동가 단톡방에 남긴 마지막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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