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고] ‘자발적으로’ ‘음란한’ 피해자들의 손을 잡는 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한사성
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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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처벌의 정치학” 기획연재⑦


온라인 공간의 성폭력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 여러 차례 충격을 주며 국정과제가 되었고, 관련 입법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성폭력 피해 지원체계에는 없었던 삭제지원 시스템이 만들어지며 제도화되었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조직도 민간 성폭력상담소부터 지자체, 여성가족부까지 다양하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문을 열 당시인 2017년엔 ‘비동의 유포’ 피해 사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점차 ‘성적 괴롭힘’ 유형이 눈에 띄게 증가했고, 심지어 ‘기타’에 해당하는 사례가 가장 많이 집계된 해도 있었다. 여가부, 피해지원센터, 경찰 등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했지만, 피해 지원 기준에서 탈락되거나 피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의 당사자들이 돌고 돌다 우리 단체에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온 세상이 강조하는데, 왜 자꾸 피해자들은 지원받을 곳을 못 찾고, 사법적 해결에 실패하고, 심지어 비난당하고 보호받지 못해 절망하게 되는 걸까?

 

▲ 2024년 9월 6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 모습. 144개 단체가 공동 주최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제공)


‘음란’하지 않아서, 피해 지원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현재의 디지털 성폭력 범죄의 구성요건은 ‘성적 욕망’과 ‘수치심’이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에 따르면, “카메라나 그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즉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음란’이 성폭력을 구성하는 요소이고, 피해촬영물이 얼마나 ‘야한지’에 따라 범죄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피해는 맥락으로 구성된다.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에 따라 피해가 되기도 하고, 아무런 일이 아니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 인스타그램에 올린 비키니 사진이 많은 이들의 하트를 받을 때는 자유로운 성적 실천일 수 있겠지만, 성희롱 댓글이 달리거나 사진이 무단으로 복제되어 남초 커뮤니티에 퍼지거나, 합성되면 피해가 된다.

 

애인과 촬영한 성관계 영상이 촬영 당시엔 괜찮았지만, 볼거리로 여기저기 유포되면 피해가 된다. 나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불법촬영물을 인터넷에서 보았을 때, 분명 내가 아닌 게 확실하지만 나와 조금 닮아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성적 촬영물이 존재할 때, 카톡에 올린 프로필 사진이 나에 대한 모욕적인 허위사실과 함께 떠돌 때 피해는 구성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위계화하는 규범에 따라 얼마나 ‘문란’하게 보이는지, ‘음란’한 존재로 취급되는지, 낙인의 시선이 덧입혀지며 ‘창녀’로 보일 때 피해가 되는 것이다. (‘창녀’라는 표현은 성매매여성에 대한 멸칭이지만, 이 글에서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위계화한 규범에 따른 낙인의 위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범죄의 ‘음란’ 기준이 그대로 피해 지원 제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성적’이지 않으면 성범죄가 아니게 되고, 유포 피해에서 필수적인 삭제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재 여가부가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성적 노출이 없는 기타 촬영물’은 삭제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제한하고 있다. 피해자는 ‘야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님에도, 본질을 놓치고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삭제하며 결국 피해자를 배제하고 있다.

 

▲ 2024년 9월 6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 모습.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제공)


‘자발적’이라서, 피해 지원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음란’해야 성폭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암묵적으로 숨겨진 또 하나의 성폭력 구성 요건은 ‘순결함’이다. 성폭력을 ‘정조의 죄’로 여겼던 구시대적 관점에 머문 채, 피해자의 ‘순결성’을 평가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음란’해진 사람의 피해는 사회적으로, 법/제도적으로, 지원체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과거부터 이 사회는 성폭력을 판단할 때 얼마나 강압적으로 도저히 반항할 수 없게 일어난 일인지, 피해자가 그 어떠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지를 꼼꼼히 따져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자발성’이 검토된다.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지긋지긋한 통념 때문에, 우리는 단체 창립 시기인 2017년부터 ‘촬영 당시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유포되었을 때 동의가 없었다면 성폭력’이라는 말을 해왔다. 합의 하에, 스스로 찍었다고 하더라도, 원치 않는 유포는 성폭력이라는 걸 강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해지원 활동을 하며, 아마 피해자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이지 않을까 싶다. 당신이 잘못을 저질러서, 실수해서, 미련해서, 아무튼 이 피해가 당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반(反)성폭력 운동에서 오래 해왔던 이 말이 피해자에게조차도 수긍되지 못할 때가 있다.

 

‘자발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해서 벌어진 일일 때, 예를 들어 스스로 자위 영상을 찍어서, 스스로 촬영물을 보내서, 일회성 만남을 해서, ‘헤프게 굴어서’ 피해를 겪은 것이라는 자책은 좀처럼 거두기가 어렵다. 당해도 싼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폭력적이거나 강제적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정조 규범을 깨버린 ‘스스로’ ‘음란한’ 여성들의 피해는 개인의 책임에 따른 마땅한 결과처럼 되어버린다.

이 낙인은 너무도 강력해서 피해경험 당사자조차도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말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는 바로 성매매 여성에 대한 비난, ‘창녀혐오’로 집행되는 처벌과 같다.

 

‘피해자’의 지위를 얻기 위해선, 피해가 일어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모두 피해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쉽다. 모든 것이 강압이었고 폭력이었을 때 가장 ‘순결’해진다.

 

그러나 그냥 ‘하고 싶어서’, ‘돈을 벌려고’ 등과 같은 이유일 때, 당사자가 한 행위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피해를 인정받고 구제받을 수 있는가? 애초에 이 사회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성적 실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성적 실천이 곧 피해로 도착하고야 마는 세상에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적 실천이 가능하기는 한가? 각자도생의 시대에 자신이 창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익이 몸을 파는 것뿐인 여성들, 몸만이 콘텐츠이고 자원인 사람들이 파는 걸 어떻게 ‘구제’할 수 있나? 성적 실천을 위해, 인기를 얻으려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돈을 벌려고 등의 이유로 스스로 벗는 여성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순결’을 강조한 성폭력 기준은 피해 회복의 문턱을 한없이 높게 만들 뿐이다. 결국 이 산업에서 소비되는 존재는 누구인지, 돈을 버는 것은 어떤 구조인지를 고려하며 피해자의 경험을 함께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 2024년 10월 18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신성연이 활동가의 석사논문(‘여캠’ 담론과 인터넷 개인방송 여성 BJ의 노동 경험, 2024) 발표 토론회 〈‘여캠’에 대하여〉에서 토론 패널로 참여한 필자의 발언 모습.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제공)


사회에서 미끄러지고 배제되는 사람들

‘스스로’ ‘음란한’ 여성들과 함께 저항하기

 

피해경험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순간이 있다. 피해의 부당함을 설명할 때 본인의 순결함을 근거로 자신이 얼마나 ‘창녀’가 아닌지 호소하며, ‘창녀’와 자신의 선을 분명하게 긋는 것을 보며, 상담활동가로서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좋을지 말을 고르게 된다.

 

장애인, 노숙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정상’ 사회는 ‘창녀’처럼 보이지 않도록,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어 몸 쓰는 일을 하지 않도록, 가난을 못 벗어나 궁핍하게 살지 않도록, 이상한 문화를 접해서 동성애자가 되지 않도록, 트랜스젠더가 되지 않도록, 다 그렇게 ‘정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은 자는 낙인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정상’으로 밀려나 떨어져 버린 자가 어떻게 낙인을 찢고 양지로 나올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걸 왜 찍는지, 그런 남자를 왜 만났는지, 그런 방송을 왜 하는지,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았다고 한심하게 여기는 태도는 ‘폭력의 구조’를 삭제해버린다. ‘정상’인 자신과 ‘비정상’인 타인을 구분해 위계화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책임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아가 ‘창녀’의 위치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위치의 여성들은 무엇을 경험하는지 볼 수 없게 한다.

 

‘창녀혐오’에 저항하는 것은 ‘창녀’를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어리고 문란하고 장애가 있고 동성애를 하고 성별 정정을 원하는, ‘정상’과 불화하는 존재와 양지를 걷겠다는 결의이다. ‘창녀’에 대한 〈불처벌의 정치〉는 법과 제도, 사회에서 미끄러지고 배제되는 사람들, ‘음란’과 ‘자발’의 기준에 탈락되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 것이다.

 

얼마 전 딥페이크로 전국이 들썩였을 때, 여성운동은 여전히 “문제는 남성문화”라고 지적했다. 모두가 예상하듯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진작부터 온라인은 일상 공간이 되었다. 기술 발전은 마법처럼 발전하고 있고, 신기한 기술을 볼 때마다 다양한 성폭력 양상을 예상하게 된다. 기술은 노고를 들이지 않고 자동화되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성폭력도 편리하게 자동화되고 있다. 요구사항만 입력하면 곧장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로 대상화된 가상의 여성을 대면하게 된다. 실존하는 피해자가 없는 그것을 우리는 왜 문제라고 얘기할 것인가.

 

우리가 싸우는 전선은 여성혐오다. 이 전선에서 우리는 ‘스스로’ ‘음란한’ 여성들과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이 글은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주최한 〈여자가 원했다는 논리 “불처벌의 정치학”〉 토론회의 토론문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신성연이 활동가 석사논문 발표토론회 〈‘여캠’에 대하여〉 토론문을 편집하여 작성했습니다.


[필자 소개] 이효린.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반사이버성폭력 활동가. 가난하고 어린 자들의 고통에 관심이 많다. 고통을 둘러싼 구조를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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